우리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죽음을 사랑하고 삶을 미워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끼는 대상에 영생을 불어 넣으려 할 때 그것은 왠지 죽음을 향한 열망처럼 느껴진다. 이를테면 조화 같은 게 그렇다 .금새 시드는 꽃의 운명을 거부하려 애쓰는 그 몸짓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영원한 죽음이다.
마크 퀸의 작품에서 우리는 조화에 못지않은, 아주 인공적인 색채로 반짝이는 꽃 그림을 볼 수 있다. 갖가지 원색으로 얼룩진 그의 꽃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 감탄을 자아내지만 색채 자체가 인스턴트 음식에 뿌려진 인공색소 같고 그 정교함과 치밀함이 비닐이나 플라스틱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보는 것은 그래서 꽃의 죽음이다.
인상적인 것은 마크 퀸의 꽃이 일반적인 조화처럼 영원한 삶의 표정을 담으려다 결국 노골적인 죽음의 표정을 찌게 된 게 아니라 애당초 화가가 죽음을 의식하고 그려 그렇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마크 퀸이 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인간의 욕망이다. 그의 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피고 지는 시기를 달리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한자리에 모여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질서를 어그러뜨린 결과다.
과거에도 서양에서는 이처럼 다른 계절의 꽃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전통이 있다. 그때 그 그림들은 그 집합의 불가능성으로 신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 마크 퀸의 그림은 그 집합의 가능성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공적인 색채나 플라스틱 같은 질감은 그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동원한 것이다, 인간은 욕망하는 만큼 진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진화의 속도와 크기만큼 존재에 대한 허무감도 커질 것이다. 바로 그 허무감이 죽음의 본질이다. 허무감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다.
마크 퀸 [Marc Quinn, 1964~]
약력
1985 캐임브릿지 대학교. 캐임브릿지, 영국
개인전
2008 마크 퀸, 가나아트센터, 서울
마크 퀸: 혁명, 화이트 큐브, 런던
앨리슨 래퍼 플린스, 포럼, 로마
2007 스핑크스, 매리 분 갤러리, 뉴욕
DHC/ART Fondation pour l'art contemporain, 몬트리올
2006 마크 퀸: 최신 조각전, 그로닝거 미술관, 그로닝겐, 네덜란드
로마 현대 미술관, 로마
2005 Flesh, 매리 분 갤러리, 뉴욕
Chemical Life Support, 화이트 큐브, 런던
Alison Lapper Pregnant, 포스 프린스, 트라팔가 광장, 런던
2004 The Complete Marbles, 매리 분 갤러리, 뉴욕
욕망의 감동적인 세계, 테이트 브리튼, 런던
Flesh, 아이리쉬 현대 미술관, 더블린
2003 감동적인 욕망의 세계 (파피오페딜럼 윈스턴 처칠 하이브리드) 굿우드 조각공원, 치체스터,West Sussex, 영국
감동적인 욕망의 세계 (프라그미페디엄 세데니), 페기구겐하임컬렉션, 베니스
2002 Italian Landscapes from Garden, 테라스 갤러리, 헤어우드 하우스, 리즈, 영국
테이트 리버풀, 리버풀, 영국
2001 Italian Landscape, 헤비타트, 런던
마크 퀸: 정원, 세기의 예술, 파리
A Genomic Portrait: Sir John Sulston by Marc Quinn: 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 런던
2000 Fondazione Prada, 밀라노
그로닝거 미술관, 그로닝겐, 네덜란드
정물, 화이트 큐브 갤러리, 런던
1999 쿤스트페라인 하노버, 하노버, 독일
1998 South London Gallery, 런던
마크 퀸 – 화신, 가고시안 갤러리, 뉴욕
1995 Art Now. Emotional Detox: The Seven Deadly Sins, 테이트 갤러리, 런던
장님이 장님 이끌 듯, 제이 조플링/화이트 큐브, 런던
1993 장 베르니에 갤러리, 아테네
1991 Out of Time, 그롭 갤러리; 제이 조플링, 런던
1990 Bread Sculpture, Galerie Nikki Diana Marquardt, 파리
1988 Bronze Sculpture, 제이 조플링/오티스 갤러리, 런던
주요단체전
2009 The Garden at 4 AM, 가나아트 뉴욕, 뉴욕
2004 꽃, 매리 분 갤러리, 뉴욕
Flowers Observed, Flowers Transformed, 앤디워홀 미술관, 피츠버그, 펜실베니아
Sculpture Installation, IBM빌딩 아트리움, 뉴욕
정원의 예술, 테이트 브리튼, 런던
2003 UnNaturally, 현대미술관, 플로리다대학교, 탐파, 플로리다
Statements 7, La 50 베네치아 비엔날레, 베니스
2002 Rapture: Art's Seduction by Fashion Since 1970, 바비칸 갤러리, 런던
Thinking Big: 21세기 영국조각의 개념,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베니스
2001 Give & Take, 빅토리아 & 알버트 박물관, 런던
London Nomad, 카이로 비엔날레, 카이로
Summer Exhibition 2001, 로얄아카데미, 런던
Metamorphosis and Cloning, 몬트리올 현대미술관, 몬트리올
2000 Out There, 화이트 큐브, 런던
Spectacular Bodies: 레오나르도에서 현재까지 인체의 예술과 과학, 헤이워드 갤러리, 런던
1999 Spaced Out: 1990후반 비키, 켄트 로간 컬렉션, CCA, 와티스 현대미술학교, 샌프란 시스코
1998 육체적 증거, 고양이의 정원, 캐임브릿지
1997 Sensation: 사치컬렉션의 젊은 영국작가들, 로얄아카데미, 런던
1996 하이브리드, De Appel Foundation, 암스테르담
뉴욕현대미술관, 뉴욕
Thinking Print: Books to Billboards, 1980-95
1995 Ripple Across the Water, 와타리움, 도쿄
Glaube, Liebe, Hoffnung, Tod, 쿤스트할레 빈, 빈
1994 Life is Too Much, 아카이 브갤러리, 파리
타임머신, 대영박물관, 런던
1993 영국의 젊은 작가들 2, 사치 갤러리, 런던
Prospect '93, 프랑크프루터 쿤스트페어라인, 프랑크프루트
Sonsbeek '93, 아른험, 네덜란드
Real, 뷘너 세체시온, 빈
1992 시드니 비엔날레, 시드니
1991 현대 거장들, 그롭 갤러리, 런던
작가소개
영국의 컨템포러리 미술가. 1991년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작품《셀프 Self》을 통해 일약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대표작가가 되었다.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삶과 고귀한 정신이다.
국 적 영국
활동분야 조각
출 생 지 영국 런던
주요작품 《셀프 Self》(1991), 《루카스 Lucas》(2001), 《임신한 앨리슨 래퍼 Alison Lapper Pregnant》(2005), 《스핑크스 Sphinx》(2006), 《엔젤 Angel》(2007)
196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991년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을 만든 작품《셀프 Self》을 통해 일약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대표작가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는 yBa의 핵심 멤버들이 다녔던 골드스미스대학 출신도 아니고, yBa의 산실이었던 데미안 허스트 기획의 '프리즈 Freeze'전(1988년)에도 참여하지 않은, 캠브리지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수많은 젊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세상의 관심과 미술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1년 제작된 《셀프 Self》 연작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자화상이라는 고전적인 주제에 자신의 피를 직접 사용했다는 점에서 굉장한 충격을 던지며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1995년 영국 테이트 갤러리의 '오늘의 미술전'과 1997년 세계적 미술품 컬렉터로 유명한 찰스 사치(Charles Saatchi)의 주도로 왕립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 전시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자신의 몸을 캐스팅하고 자신의 피를 직접 이용하여 만든 《셀프 Self》는 단순한 하나의 자화상이 아니다. 약 4.5리터의 피를 뽑아 제작한 이 작품은 냉동 장비에 의해서만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 즉, 특정한 환경에 의해 존재하거나 또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마크 퀸은 그 후 조금씩 자신의 피를 뽑아서 모았다가 5년마다 한 작품을 만들었다. 1996년 만들어진 두 번째 《셀프 Self》는 찰스 사치가 소장했다가 청소부가 실수로 냉동장비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망실된 것으로 유명하다. 생명이 얼마나 여리고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마크 퀸이 1991년부터 현재까지 천착하는 문제는 바로 생명이다. 갓난 아들 루카스(Lucas)의 두상을 아기의 태반으로 만들어 얼린 작품 《루카스 Lucas》와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졌던 《임신한 앨리슨 래퍼 Alison Lapper Pregnant》, 22주 된 태아가 기도하는 모습을 해골 모양으로 빚은 《엔젤 Angel》에서도 그는 궁극적으로 생명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삶과 고귀한 정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주요 작품에는《셀프 Self》(1991), 《루카스 Lucas》(2001), 《임신한 앨리슨 래퍼 Alison Lapper Pregnant》(2005), 《스핑크스 Sphinx》(2006), 《엔젤 Angel》(2007) 등이 있다.
이번 가나아트 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마크 퀸의 전시. (2008. 7. 11 ~ 8. 3)
- 마크 퀸의 작품 가운데 내가 제일 처음으로 보았던 것-그리고 이것은 국면의 전환에 불과했다-은 작가의 얼린 피 4리터로 자신의 두상을 본떠 만든 작업 「Self」(1991)였다. 이 첫 만남은 휑하고 무표정하며 비행기 격납고마냥 널찍한 런던 사치 갤러리에서였다. 영하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을 유리 상자 너머로 우중충한 브라운 톤의 얼굴이 파라오의 험상궂은 태곳적 눈빛을 하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작품의 재료에 대해 모르고 있던 상태였지만 나는 작품의 구성에서 어딘지 불안하면서 본능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얼룩덜룩한 색채, 표면의 깊숙한 균열들, 꾹 감은 눈. 이 모든 것들이 음침하고 불길한 프락시스, 형태와 내용의 불유쾌한 결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최근에 보았던 작품은 아직 완성단계 전의 것들이었다. 작가는 열혈 보디빌더, 극단적인 신체 변형자나 극성 성형수술 자처럼 독특한 외모를 가진 인간 군상들로 조각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센트럴 런던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 드로잉, 사진, 노트들을 모으고 있다.
● 1991년부터 현재까지 마크 퀸은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왔고 그럼으로써 아방가르드의 변방으로부터 문화적 중심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처럼 비타협적이고 지적인 현대 작가치고는 전대미문의 행보였을지 모른다. 2006년 그는 무게가 15톤에 달하는 대리석 조각 「Alison Lapper Pregnant」을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네 번째 기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 지금까지 그곳은 비워져 있다. 중증장애를 가진 임산부를 실물 크기의 몇 배로 확대하여 표현한 이 작업이 넬슨제독이나 네이피어 장군 같은 영국의 국민영웅들이 입성해있는 곳과 동일한 공공광장에 들어서게 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마크 퀸의 작업이 성취한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 뿐만 아니라 그 작업이 지닌 대단한 타당성까지 방증한다.
● 마크 퀸은 골드스미스 대학 출신이라는 출발선상의 공통분모가 없음에도 ‘YBAs’로 불리는 젊은 개념주의 예술가군(데미언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사라 루카스, 앵거스 페어허스트 등)에 속하는 작가로 분류된다. 1988년 데미언 허스트가 기획했던 『프리즈』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997년 로열아카데미의 『센세이션』展이 열릴 즈음에는 트레이시 에민, 데미언 허스트와 함께 당시 영국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 작가 3인 방으로 당당히 군림하게 된다.
● 확실히 마크 퀸과 일부 YBAs 작가의 작품 사이에는 근친성이 있다. 특히 허스트의 경우처럼 신체, 죽음, 조각상의 미에 대한 집착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의 두드러진 차이 역시 존재한다. 마크 퀸이 본격적인 작가로 출발하기 전의 시기와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요소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이 차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마크 퀸은 캠브리지 대학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전공했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계 쪽으로 접어든 것은 상당히 이른 시점이었으나 이목을 끌만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보다는 자신에게 적절한 매체를 찾기 위해 예술적 노력의 기록과 자취들을 찾아헤매는 원형개념주의자(proto-conceptualist)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 자신의 신체를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 동기 역시 다음과 같은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곧 그것은 신체적 경험의 중심성에 대한 어떤 관습적인 반응도 아니었고,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같은 전형적인 공식의 답습은 더욱이 아니었으며, 다만 작가 자신이 좌지우지 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가 장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작업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것 외에도 작가가 경험했던 알코올중독 증상이 있었다. 정신을 병든 신체가 던지는 광폭한 요구의 꼭두각시, 노예로 만드는, 신체를 상하게 하는 그 질환. 과장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이 알코올중독자의 세계인식 체험이 자신의 신체를 한층 더 객관화하고 나아가 그것을 인공물처럼 만들고자 하는 마크 퀸의 충동을 형성했으리라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을 듯하다.
● 마크 퀸의 첫 번째 시기-「Self」를 필두로 하는-는 무수히 다양한 작가의 ‘아바타’들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는 빵으로 자기 모습을 만들었고, 자신의 배설물을 이용해 자신 얼굴 모형을 제작했으며, 자신의 신체를 모델로 투명한 모형을 만들어 와인을 가득 채운 뒤 비워버렸다. 유리를 불어 만든 섬세한 형태 속에 작가의 신체 일부-페니스, 토르소, 머리 등등-를 수은으로 만들어 집어넣기도 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신체 모형을 뜰 때 썼던 재료에서 뜯어낸 부스러기로 만든 작품들이다. 작가는 이 거품과 고무의 탈피들을 ‘간(肝) 없는 생명체의 사례들’이라고 묘사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자신의 얼굴과 두상을 뜨고 남은 빈 틀을 활용한 작품도 있었고, 무엇보다 가장 도발적인 작품이라면 자신의 배설물로 온갖 얼룩과 소용돌이, 아라베스크를 커다란 캔버스 가득 그려놓은 작품 「Shit paintings」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전반적으로 볼 때, 「Self」작업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막강한 영향력의 아버지를 뒤잇고자 했던 어느 현대 영국 작가의 누구보다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하지만 추상 시대의 위대한 구상화가 베이컨은 인체형태 속에 내재한 심리적 내용을 드러내고자 3차원 공간 속에서 피사체를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인체 형태를 왜곡했다. 반면, 마크 퀸은 재료, 시간, 정체성 의식 등을 돌려가며 자신의 신체형태를 왜곡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배반하는 것들에 항상 매료되어 왔다. 빵을 이용해서 조각-빵 두상-을 만들고, 청동으로 형태를 떠서 표현주의적인 청동조각처럼 보이도록 했다. 조각의 형태는 순전히 빵이 구워지는 과정에서 생긴 자의적인 효과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전복시키는 것을 좋아 한다… 이것과 저것의 경계지점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사랑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작업들이 등장한다. 「Self」 작업과 분명한 단절을 이루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크게 “나와 타인”이라는 주제로 묶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을 보였다. 이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미우치아 프라다를 위해 제작된 「Garden」(2000)일 것이다. 몇 개의 극저온 유리상자 안에 나눠 담겨 결코 함께 자랄 수 없는 식물들로 만들어진 이 정원은 분명한 미학적 규범에 부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설고 비현실적인 미를 보여준다. 작품은 관객들을 마치 갤러리에 갇힌 앨리스처럼, 빨간 하트 여왕의 장미정원에서 추방당한 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숲들 사이를 여기저기 떠도는 상태로 이끈다. 「Garden」은 2000년 이후부터 마크 퀸을 사로잡기 시작했던 환경에 관한 질문들(‘관심’이라는 표현은 이 자리에서 쓰기엔 지나치게 선동적이다)을 뚜렷이 예고하고 있다.
● 그러나 마크 퀸의 작업을 이러한 도식으로 환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며 나아가 주요 대표작들만큼이나 그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주된 몸통으로부터 뻗어 나온 무수한 곁가지들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관절이 탈구된 동물사체를 표현한 브론즈 작품, “고기 조각(meat sculptures)”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괴한 형상을 취한 생체부위들은 기념비조각의 파괴된 흔적들을 연상시킨다. 또는 작가의 피를 얼려 화병을 만들고 그 안에 얼린 난초 생화를 꽂아두었던 「Ressurection」 (1999) 같은 작업에서처럼 작가/작품의 혼융을 심화시키려는 일관된 시도를 떠올리게도 된다.
●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작품이란 두뇌구조와 같다. 나의 작업들은 모두가 신경세포 같은 연결 망들로 이어진다. 새로운 작품은 태어나는 것도 그 안에서이다. 다른 작품들에서 신경망이 촉발되어 나와 내가 제작 중인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 때 작품은 제 스스로 당신에게 무언가, 당신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따분한 전시가 되고 만다.”
하지만 2000년도 중반에 이르면 마크 퀸의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세 가지 주된 흐름이 굵직하게 부각되기에 이른다. 이번 전시는 그 흐름들을 대변한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과학일반,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첨단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인간인, 그리고 세계 안에서의-자기 인식에 미친 영향이다. 마크 퀸이 시대정신에 입각한 작가임은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누구든 「The Selfish Gene」(2007)이나 「Early Self-Portrait」(2007), 「Big Bang Pop」조각 두 점-「Tarantual Nebula」와 「White Dwarf」(2006)등을 보게 된다면 그 작품들을 인간게놈의 ‘배열’과 함께 ‘배열’시키는 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의 명증한 설명성-뭉개진 표면이나 다듬지 않은 가장자리는 일절 없으며, 질감 역시 정확히 필요한 곳에 표현되어 있다-일종의 개념적 냉담함의 표현이다.
● 「Big Bang Pop」에 대해 마크 퀸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 작품들은 ‘팡’ 터지는 폭발의 순간에 포착된, 그래서 이미 그 자체로 ‘폭발’ 조각이라 할 수 있는 팝콘의 핵들이다. 나는 팝콘을 컴퓨터로 스캔한 뒤 팝콘의 폭발을 정확히 묘사한 시뮬라크럼을-로봇이 하듯-조각하는 데 그 정보를 활용했다. 나는 그 작품들이 정지된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 대체로 환경을 주제로 했던 작업들, 예컨대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대형 꽃 그림이나 화분식물들로 대표되는 작업과는 달리, 청동으로 형태를 뜨고 크롬으로 마감한 돌연변이 식물들-난초에 열린 토마토-은 ‘접합’이라는 정원사가 키우는 정원을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정지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으로부터 추상화된 순간에 가깝다. 마치 외계행성의 어느 크레이터에 건설된 인류문명이 낯선 침입자들을 골탕 먹이거나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해 남겨놓은 유적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혹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정체 모를 진화 촉매제 모놀리스에 대한 작가의 재빠른 응수일지 모를 일이다.
마크 퀸은 반자연적인 것에 대한 자신의 이 같은 천착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그것들은 욕망과 진화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연 속에서는 절대 같은 시간대에 존재할 수 없지만 순전히 인간의 욕망 때문에 시장에서 같은 날 한꺼번에 구입할 수 있는 이런 다양한 종류의 행성들을 가지고 있다.” 내게 이 말은 쇼펜하우어의 세계관 그리고 모든 생명은 존재하기 위해 영원한 투쟁 중에 있다는 도교적 관점을 떠오르게 한다.
● 작가의 생각은 이렇다. “그들은 생성되기 위해 투쟁 중이다. 하지만 그들이 실제 무엇이 되는가를 결정짓는 것은 우연이다. 내가 「Self」에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조각이 철저히 어떤 하부시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기가 나가면 이 조각은 망가지고 만다. 작품이 녹아버린 다음 누군가가 ‘형상이 어디로 갔소?’라고 묻는다면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고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대단한 은유로 다가왔다. 인간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단지 존재했다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뿐이다.”
● 정체성, 선천적 본성 대 후천적 양육, 우주의 기원과 특정 장소의 기원. 키메라, 반인반수, 그리고 돌연변이. 「Beauty and the Beast」(2005)이나 「To Be or Not to Be」(2006) 등의 작업들, 상호참조적인 텍스트로서의 타이틀, 게슈탈트를 구성하는 재료와 주제.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머릿속은 어느덧 과거나 미래로 이어지는 통로들을 동시에 헤매게 되고, 개체의 필멸성과 종의 사멸이라는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마크 퀸의 작업이 보여주는 세 가지 흐름 중 가장 두드러진-그리고 심지어 충격적인-것은 영국의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신체를 모형으로 뜨고, 변형하고, 개조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는 10세기에서 12세기의 남인도 촐라 왕조를 연상시키는 「Endless Column」의 모핑 이미지에서 순금 조각 「Siren」의 모형에 이르기까지, 케이트 모스를 모델로 한 작품들이 다수 있다. 이 부분에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인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2007년 봄 나는 그와 함께 유명한 “모아이”, 곧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어느 고대문명의 종교적 삶에서 핵심을 차지했던 그 거대조각상을 보기 위해 태평양의 이스터 섬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오지만디아스들을 보는 동안 작가는 현대의 유명인사 숭배와 과거의 제의적 예술작품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 “나는 조각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무엇에도 점유되지 않는 방식, 오로지 그 안에 정신이 깃드는 과정에 흥미가 있다. 촐라 청동상 같은 고대인도 조각들을 보라. 이 조각들은 남신과 여신을 표상한다. 적절한 조건만 주어진다면-제대로 씻기고 올바른 장소에만 놓는다면-그것들은 신이 된다. 온당하지 않은 곳에서는 고철 조각에 불과하다. 바로 5분전에 그것을 경배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만든 케이트 모스의 조각들도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 조각들은 우리의 욕망과 열망이 깃든 이미지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곧 어느 면에서 모든 구상조각들은 우리의 정신적 갈망이 담기기를 기다리는 빈 그릇인 것이다.”
● “케이트 모스의 조각을 제작하면서 내가 매료 당했던 부분은 그녀가 내게 현대판 여신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 중 하나가 우리의 신들이 그 안에 어떤 도덕적, 영적, 형이상학적 구조를 가진 신성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채워놓았다는 점이었다.”
● 케이트 모스가 신격화된 상은 「Siren」일 것이다. 이 실물 크기의 순금 18캐럿 조각 작품-고대 이래 가장 큰 순금 조각-은 완성되고 나면 명성이라는 마크 퀸의 합성 종교가 지닌 잠재적 함축을 훌륭히 현실 속에 실현할 것이다.
● 올 봄에 있었던 마크 퀸의 가장 최근 전시 『Evolution』에서 나는 그가 자신의 작품이 전개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에 관련하여 광범위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앞에서 말한 내용들을 차분히 되짚어본 후,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한편으로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대상들-신체, 유기체, 물질-을 여전히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자체적인 내러티브, 신화적 성격을 띤 내러티브를 구축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문제로 되돌아갔다.
● 그는 말했다. “글쎄, 신화란 사회의 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꿈은 개인의 신화이다. 케이트 모스의 조각과 관련하여 내가 흥미 있어 했던 부분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신화적인 이미지, 우리가 지닌 꿈의 일부지만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인 그것을 만들어보려는 시도. 꽃 조각을 만들었을 때 했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꽃을 얼리는 순간, 그것은 실제 사물로부터 이탈되고 분리된 이미지가 된다. 우리가 ‘케이트 모스’라고 알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 케이트 모스로부터는 분리된 그녀의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는 마치 블랙홀처럼 정신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거대하고 혹독한 무엇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신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를 만들고픈 본능이 사실 있는 것 같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는 우리를 만들지 않는가.”
● 이 말은 퀸의 작업을 직접 그리고 아마도 처음 접하게 될 관람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출발점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는 우리를 만들지 않는가?” 이것은 기분 좋게 당황스러운, 그리고 겸손하면서도 야심만만한 명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마크 퀸이 현대 서구사회의 한복판이라는 작업 현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인류학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어디까지 수행할 수 있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