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삼베로 둘러싼 패널 위에 생석회와 아교를 섞은 제소(Gesso)를 10번 정도 칠하고 그라인더로 표면을 깎아내고 다듬는 반복의 노동 과정을 거쳐 일정한 두께의 순백의 화면을 만든 뒤 그 위에 금박(Gold Leaf)과 백금박(White Gold Leaf)을 덧붙여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작가는 "제소를 칠하는 데는 굉장한 노동력을 요구하는데 한 번 칠하고 나면 체력이 모두 소진되곤 한다"고 했다.
결과만 중요시 되는 요즘 세상이지만,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작품이 더욱 빛나 보인다. 하얀 평면 위, 마음을 움직인 심연의 세계, 그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모든 과정 속에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순백의 평면 위에 금박이라는 또 하나의 평면을 붙여나가는 과정에서 미묘한 양감이 나타난다. 빛의 방향에 따라 반사되는 화려한 빛의 변주도 느낄 수 있다. 절대적인 평면이지만 빛의 변주에 따라 작품은 환상적이며 스펙터클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물성이 주는 강렬한 인상! 모노크롬 회화(단색 회화)의 진수다.
구자현 / Koo, Ja-hyun / 具滋賢
구자현의 작품은 두 종류의 시리즈로 구분된다. 실크스크린 기법과 목판 기법을 사용한 ‘판화(Printmaking)’ 연작과, 특수 도료를 여러번 올린 평면위에 금지와 백금지를 콜라주한 ‘타블로(Tableaux)’ 연작이 그것이다. 이들 두 시리즈는 표현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작가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명증하게 나타내는 공통분모들이 있다. 전기했듯이 형식적인 측면에서 대형화면을 선호하는 가운데 극도의 간결한 조형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재료와 물성의 속성에 큰 관심을 보이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작품의 제작 행위 혹은 표상 과정 저간에는 작가가 구현하려는 어떤 정신성이 강하게 스며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형식과 내용상의 특성들은 구자현의 작업이 모더니스트의 계보를 따르고 있음을 알게 한다. 특히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감지되는 평면성에 대한 집착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주장한 회화의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과 내용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구자현을 모더니스트로 규정하는 것은 별로 환영할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자기목적성과 환원주의의 노정으로서 대별되어온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을 극복하려는 태도로서 감성과 직관 그리고 일루전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점은 구자현의 작품을 둘러싼 비평의 관건이 된다.
실크스크린 기법의 판화작업 시리즈, 그의 대형 판화는 작가의 치밀한 조형관과 장인적 구현능력을 단숨에 보여준다. 작가는 원형 혹은 타원형의 이미지를 담은 하나의 거대한 원판을 만든 후 이를 이용해 다수의 색면을 중첩해 화면에 올린다. 작가는 서너 차례 반복되는 프린팅의 과정에서 원의 중심을 살짝 어긋하게 함으로서 색면의 외곽에 색띠의 층을 만들어 내는데 여기에 그의 작업이 지닌 백미가 있다. 최종으로 올린 거대한 화이트 혹은 블랙의 면은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중첩된 색띠의 배치에 의해 시선을 압도하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거대한 단색면 사이로 수줍게 비치는 적, 청, 황, 녹의 색면들은 마치 신비로운 서클의 무지개처럼 자연과 생명의 리듬과 운율을 드러낸다. 구자현의 실크 스크린 판화는 창조의 과정에서 작가가 시도한 스퀴즈의 흔적이 심연의 환영으로 변주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블랙홀처럼 관자의 시선을 빨아드리는 거대한 색면 공간을 거슬러 드러나는 것은 노동의 행위와 시간이다.
한편 구자현의 목판 시리즈는 실크 스크린 연작과 다른 기법과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동일한 조형관을 보여준다. 대형 목판화에 새겨진 무수한 단선의 터치들은 나무판 위에서 작가가 시도한 치열한 행위와 노동의 시간을 보여준다. 대지를 일구는 농부처럼 작가는 목판 위에서 일상의 사색을 행했을 것이다. 작업하는 동안 작가가 떠올린 삶의 단상들 만큼이나 수많은 터치들이 화면 전체에 씨앗처럼 뿌려졌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목판 시리즈에 ‘무제’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붙였다. 그의 경우 제목이 없음은 무(없음)가 아니라 공(비움)의 적극적인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터치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가 채움의 과정이 아닌 비움의 과정이라는 것을 작가는 작품 제목을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의 대형 목판 작업은 절대자유를 갈구하며 존재의 본성을 찾아나선 실존주의자들의 태도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조각도가 가르는 결의 방향은 수평과 수직의 구축적인 율을 따르고 있음도 주목할 대목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금지 혹은 백금지를 입힌 타블로 시리즈는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경향으로 보인다. 황금과 은색 플라티늄 재질이 발산하는 특유의 광휘는 그의 작품에 풍요롭고도 화려한 상징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작가는 질료로서 황금의 물성을 캔버스의 평면구조와 대질함으로서 황금을 둘러싸고 파생된 부와 권력 그리고 영화와 영원성 따위의 기호적 의미를 예술의 이름으로 담아내기를 시도한다. 금의 기호는 과연 강한 것이다. 이집트의 황금관에 새겨진 영원의 빛으로부터 시작해 고대 불상의 성스러운 종교적 메시지에 이르기 까지 그것이 표상하는 기호 세계는 거칠고도 다양하다. 작가는 원과 사각의 화면구조와 격자무늬의 추상적 조합형식으로 이러한 금의 메시지를 순수한 창조적 빛을 머금은 순수 에너지의 차원으로 변주시키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대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금지가 주는 기호적 의미와 작품 형식 사이에 불균형적 충돌 관계는 필자에게 미적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금을 다루는 일이 과연 쉽지가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구자현의 금지회화에 주어진 비평적 물음과 더불어 그의 평면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창조적 역량은 근간에서부터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작가의 창조적 기반은 회화예술의 조건인 캔버스의 표면에 대한 장인적 프로세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젯소를 십 수차례 덧칠하면서 얻어낸 평면의 질감과 공간감은 그의 타블로가 지닌 특장의 요소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미 국내외의 미니멀리즘 혹은 단색 평면주의 화가들에 의해 실험되었던 기법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형 캔버스에서 풍기는 힘은 덧칠이 파생한 중첩 공간과 교차하면서 차별화된 힘을 지니고 있다. 이는 판화작업에서 구가하고 있는 장인적 기질과 색면 공간을 숨결과 생명이 충만한 여백으로 이끌어내는 조형능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이러한 요소들은 그의 작업 형식이 모더니즘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으나 극동의 예술에서 축출된 절제된 서정과 감흥의 미감을 고양시킨 차원으로 한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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