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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갤러리] 전혁림

민석도서관/한 점 미술관

by 도서관놀이 2016. 10. 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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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혁림 Jeon Hyuck Lim(1916-2010)

제목: 한국적 풍물1
크기
: 181x226cm
재질
: Oil on canvas
제작: 2003
전시 위치 2-3층 계단.

제목: 한국적 풍물2
크기
: 181x226cm
재질
: Oil on canvas
제작
: 2003
전시 위치 2-3층 계단.

제목: 한려수도
크기: 600x238cm
재질: Oil on canvas
제작: 2007
전시 위치 1층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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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혁림 Jeon Hyuck Lim(1916-2010)

전혁림 생애 및 활동사항

1916. 1. 21 경남 충무 출생

1915년 1월 21일 경상남도 통영시 무전동 478번지의 소지주였던 전계주의 3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9년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통영수산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한 후 진남금융조합에서 일하면서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했다. 1938년 부산미술전에 「신화적(神話的) 해변」, 「월광(月光)」, 「누드」가 입선하면서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의 신진 서양화가로 주목을 받았다.

통영에서 해방을 맞은 그는 통영문화협회 창립 동인(유치진, 윤이상, 유치진, 김춘수, 김상옥 등 참여)으로 참여했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정물」로 입선한 후, 1953년 제2회 국전에서는 반추상의 「늪」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까지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국전 운영의 비리에 실망하여 이후 국전을 외면하고 ‘통영의 화가’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6·25전쟁 이후 피난지 부산에서의 생활은 전혁림이 화가로서 기반을 다지는 토대가 되었다. 1952년 부산 밀다원 다방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연 후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었으며, 1950년대 후반 추상회화를 수용하여 부산 추상회화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부산의 대한도자기회사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했던 전혁림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에 도화, 도조, 채색 테라코타 등 도예와 회화작업을 복합시키는 독특한 작업을 전개했다. 1970년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하던 이 시기 작품은 대부분 통영 일대와 그 인근의 갯마을 등 향토적 풍정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활달한 붓놀림, 짙은 청색조의 추상적인 화면, 부감법에 의한 구도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이다.

1977년경 부산생활을 청산하고 충무(지금의 통영시)로 귀향한 그는 1979년 『계간미술』에 ‘과소평가 받는 작가’로 소개되면서 서울의 화랑에서 작품 주문이 이어지는 등 예순 살이 넘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1984년 제3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과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충무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88년 인도, 이집트, 그리스, 영국,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뉴욕의 스페이스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89년 중앙일보사 주최의 ‘전혁림 근작전’을 통해 민화나 단청에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인 색채와 선, 문양을 소재로 한 독특한 색면구성의 추상회화를 선보이면서 우리 고유의 색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조명한 색채화가로 평가받았다. 특히 푸른색을 주조로 하면서 빨강, 노랑색과 대비시킨 선명한 색채와 민화나 단청, 전통음악 등을 도입한 이 시기 작품은 ‘한국미’의 추구로 요약할 수 있다.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혁림을 올해의 작가로 선정하였고, 2003년에는 아들 전영근이 통영시에 전혁림미술관을 설립하였다. 2005년 이영미술관에서 ‘90, 아직은 젊다’를 열어 대기만성형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도자, 목조, 입체회화, 도자회화 등 광범위한 장르를 두루 개척했던 전혁림은 2010년 5월 25일 향년 96세로 3천여 점의 작품과 고향 통영에 자신의 미술관을 남기고 영면했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부산시 문화상을, 1984년에 충무시 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1996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2000년에는 부산 일맥문화재단에서 주는 일맥문화상을, 2002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였다. 2010년 전혁림이 타계한 이후 전혁림미술관에서는 매년 추모전을 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혁림 [Jeon Hyuck Lim, 全爀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혁림 약력

1916. 1. 21 경남 충무 출생
1929  통영보통학교 졸업
1933  통영 수산전문학교 졸업
1938  1938 부산 미술전에서 <신화적 해변> <누드> <월광> 출품
1947  경남미술연구회전 출품
1949  1회 국전입선
1945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 (김상옥, 김춘수, 유치환, 윤이상 등)
1952  부산밀다원 제1회 개인전, 통영 호심다방에서 유강렬, 이중섭, 장윤성 등과 함께 4인전 개최
1953  
2회 국전에 <>을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 수상
1955  4회 국전 특선
1956-1962  도자기연구-도자기 채색화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 및 실험제작 (대한도자기, 부산)
1962  국전 무감사 출품
  
      5회 부산시 문화상 수상(미술창작상)
1965  국제자유미술전 출품(일본 동경)
 
       문화공보부 주최 3.1절 기념전 출품
 
       3월에 부산에서 개인전
1969  서울국립공보관에서 제1회 회화, 도예개인전
        부산상업은행 화랑에서 도자기 전시회 개최
1970  진해에서 도화및유화 개인전
1971  서울 코스모스백화점에서 제2회 회화도예전(6.25-7.3)
1974  1월 부산에서 개인전
 
       11월 서울춘추화랑 초대개인전
1975  부산공간화랑에서 소품초대전
1976  부산명인화랑에서 회화도예전
1977  충무 호심다방에서 통영수산전문학교 개교 60주년 초대개인전
 
       부산 수로화랑에서 3인초대전
1979  서울 예화랑에서 5인초대전
1980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80 현대작가초대전> 출품
1981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한국의 자연전> 출품
        KBS 신체장애자를 위한 자선미술전 출품
        서울 춘추화랑에서 초대개인전(11.26-12.2)
1982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독립기념관 건립기금모금전에 출품
1983  서울샘터화랑에서 유화/도예 초대개인전(4.15-4.24)
        국립현대미술관 <83 현대미술초대전>에 출품
1984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서울샘터화랑에서 유화도예 초대개인전(12.8-12.17)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
 
       충무시 문화상 수상
 
       서울신세계미술관 기획 <산을 주제로 한 서양화초대전> 참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협전> 출품
1985  국립현대미술관 <한국미협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85 현대미술초대전> 출품
 
       샘터화랑에서 전혁림 입체회화초대전
1986  1회 서울아트페어에 샘터화랑작가로 참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 출품
1987  화집전혁림발간 (예문사)
1988  해외미술기행 (인도, 이집트, 그리스, 영국, 프랑스 등지를 여행함)
 
       국립현대미술관 <88 현대미술초대전>에 출품
 
       맥향화랑에서 초대전(3.17-3.28)
        미국 뉴욕 스페이스 화랑에서 개인전
1989  중앙일보사 주최로 호암갤러리에서 초대개인전(10.25-11.13)
1990  샘터화랑, 부산갤러리월드에서 초대개인전(11.15-11.24)
 
       동경아트페어 참가
 
       예술의 전당 미술관 개관기념전 <한국미술 오늘의 상황전> 출품
        8월 동아일보사 기획 <백두산 실경전>참여작가로 중국을 거쳐 백두산에 오름
1991  국립현대미술관 <90 신소장품전> 출품
 
       동아일보사 주최 <백두산 실경전>에 출품
1992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개인전(6.2-6.11)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회화전>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92 현대미술초대전> 출품
 
       우리미술연구소에서 작품집 <전혁림>이 간행됨
 
       경상남도 미술대전 대회장에 추대됨
1993  예술의 전당 전관 개관기념 <현대미술전> 초대 출품
  
      국제미술교류협회 주관 동경미술관 출품
        서남미술관 기획 <장승의 해석전>에 초대 출품
  
      경상남도 미술대전 대회장에 추대됨
1994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국제현대미술제> 출품
 
       동아일보사 주최로 작품집 발간, 일민문화관에서 개인전(6.7-6.18)
 
       예술의 전당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 출품
1995  중국 북경 중국미술관 <한국현대미술북경전> 출품
        선재미술관 <오늘의 작품전> 출품
1996  예술의 전당 <21세기 아름다운 공룡전> 출품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상
1997  선화랑에서 개인전(10.21-11.1)
1999  부산 공간화랑에서 초대개인전
 
       마산 MBC 문화방송 주최 초대개인전
2000  일맥 문화상 수상(부산 일맥문화단)
2001  국립현대미술관 <손의 유희: 원로작가드로잉전> 출품
2002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대회화 100>전에 <> (1953) 선정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2002:전혁림전> 개최
2003  전혁림의 88세전(이영미술관)
 
       전혁림미수기념전(수원이영미술관)
2004  전혁림미수기념전(전혁림 미술관)
2005  전혁림 신작전 "90, 아직은 젊다"(이영미술관)
2005  한국국제아트페어출품 서울 삼성동 코엑스전시장
2006  마산 MBC 창사 37주년 전혁림화백 특별초대전

보도자료1

"평생 그려온 바다색이 몸에서 지워지지 않네"

전시회 여는 현역 최고령 화가 전혁림 인터뷰
"끼니 걸러도 물감만은 최고급으로 써
 예술은 천성배워서 되는 게 아냐      

아흔네 살 노인이 생선 얹은 흰밥을 꼭꼭 씹었다. 바다에서 미풍이 불었다. 밥을 다 먹은 노인이 입가를 닦은 뒤 살림집 부엌에서 일어나 아래층 작업실로 향했다. 쉰두 살 외아들이 부축했다. 붓을 쥐는 노인의 손은 손톱이 짧고 손등이 푸르죽죽했다. 청색 물감이 스며든 손등을 내려다보며 노인이 말했다. "평생 바다를 그렸으니까. 인자는 마 씻어도 안 지워지지."

지난달 노인은 61년간 해로한 아내의 49재를 치렀다. 아내가 투병하던 마지막 일년간, 그리고 아내를 보낸 뒤의 두 달간, 그는 늘 그래왔듯 하루 다섯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그리운 내 친구유치진·유치환 형제, 윤이상, 김춘수"

통영에서 태어나 한평생 고향을 지킨 화가 전혁림(94) 화백이 831일까지 수원 이영 미술관에 대작 넉 점을 건다. 가로 7m, 세로 2m짜리 유화 한려수도의 추상적 풍경, 가로·세로 12짜리 목기 1050점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설치작품 새 만다라등이다.

유화 두 점, 설치작품 두 점을 완성하는데 각각 짧게는 네댓 달, 길게는 5년이 걸렸다. 전씨가 화폭 윗부분을 그릴 때면 외아들 영근씨가 뒤에서 아버지 허리를 꽉 끌어안아 지탱했다. 영근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버지를 모시며 그림을 배우고 작업을 거들어 왔다.

전혁림 화백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통영수산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서 23세에 부산미술전에 입선했다. 건국 직후부터 6·25가 터질 때까지 그는 열 살 위 극작가 유치진, 일곱 살 위 시인 유치환, 두 살 아래 작곡가 윤이상, 일곱 살 아래 시인 김춘수 등 통영이 낳은 그 또래 예술가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열한 살 아래 소설가 박경리와는 별다른 교분이 없었다

"날마다 탁주집에 모여 앉았지. 시 얘기, 음악 얘기, 그림 얘기. 사실 그런 얘기보다 오히려 나날이 먹고 사는 얘기를 많이 했지요. 저 세상에 가면 나는 맨 먼저 그이들을 찾아 가지고 '여러분이 남긴 음악과 시를 내가 열심히 화폭에 옮기다 왔다' 하고 싶어요."

이중섭에게 뺨을 맞다

부산 피란 시절 그는 광복동 여인숙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전후엔 부산과 통영을 오갔다. 부산에서 만난 두 살 아래 화가 이중섭과 함께 통영에 돌아와 3년간 같은 동네에 살기도 했다.

"하루는 중섭이가 찾아와서 난데없이 뺨을 때립디다. 재불(在佛) 화가 한묵이 통영에 왔기에 내가 중섭이 빼고 그이만 저녁을 샀는데 그게 섭섭했나 봐. '왜 먼 데 사는 사람은 밥을 사 주고, 가까운 나는 안 사주오?' 하데. 그러고도 이튿날이면 날 보고 벙긋 웃었지요."

전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열세 살 연하의 부인이 양말 행상, 내복 행상으로 자식 셋을 먹였다. 온 가족이 몇 달씩 고구마만 먹기도 했다.
한번은 몇 달씩 집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외아들 영근씨가 부산 여인숙에 찾아갔다. 비좁은 방에 사람 하나 겨우 누웠다 일어날 공간만 빼고 물감과 캔버스가 꽉 차 있었다. 몇 달째 라면만 먹던 전 화백이 아들을 위해 어디선가 쌀 한 주먹을 얻어와 밥을 했다.

부인에게 머리칼을 뜯기다

전 화백은 "끼니가 없어도 물감만은 당시로선 최고급인 일제 분포도(文房堂) 제품을 썼다"고 했다. 값비싼 일본 미술잡지도 꼬박꼬박 사 봤다. 참다 못한 부인이 전 화백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여자가 달겨드니 우짤 도리가 없데. 때릴 수도 없고. 내 하도 기가 막히서 나중에 물어봤지. '니 그런 거는 어데서 배웠나' 하고. 처가 '주위에서 이라라고 가르쳐 줍디다' 하데요."

전 화백은 "그래도 처는 평생 단 한번도 내게 '그림 그리지 말라' 소리를 안 했다"고 했다. 그는 투병 중인 부인에게 "내보다 먼저 가지 마라" 말하곤 했다. 부인의 상여가 나가던 날 노인은 지인들에게 목 메어 중얼거렸다.

"살아만 있으면 (내가 보기에) 얼매나 이쁘겠나. 작대기 짚고 걸어 댕긴다 캐도, 그것도 못해 누워만 있다 캐도 얼매나 이쁘겠나."

그는 1953년 국전에서 특선한 그림을 10만원에 팔아 부인에게 양산을 사줬다. "처에게 뭘 사준 건 그기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그는 일흔을 넘겨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남들이 은퇴하는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흔 넷, 나는 아직 젊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나는 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된다'는 자신과 희망이 있었다"고 했다. "거지가 되어도 그림을 그리고 말겠다는 각오가 있었다"고도 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선생'이 없어요. 배워서 하는 게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오. 힘들게 살았지요. 그러나 돌이키면 딱히 슬플 것도 없어. 인생이 그런 거니까. 다만 가난 때문에 외아들을 대학에 보내지 못한 것은 한스럽지요. "

아들 영근씨도 아버지를 모시면서 꾸준히 자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오는 11~12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 부설 갤러리와 콜로라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내년 4월에는 독일 베를린의 아인슈타인 갤러리에서 기획전을 연다. 전 화백은 언젠가는 내 아들이 나보다 뛰어난 화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작업실 벽에 붙은 포스터에 "구십, 아직은 젊다"(2005년 수원 이영 미술관 개인전), "아흔셋 전혁림 새 그림전"(2007년 서울 갤러리아이캠 개인전) 같은 글귀가 적혀있었다. 18년째 교분을 쌓은 김이환(74) 이영 미술관장이 "선생님, 백수(白壽) 하셔야지요" 했다. 백발의 전 화백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얼마간 피로해 보였으나 눈동자는 청년처럼 또렷했다.

2008. 6. 9조선일보 &Chosun.com

/통영=·사진 김수혜 기자 goodluck@chosun.com

보도자료

"그림은 내가 살아 있다는 존재의 표현"

# 부산아트센터에서 전시 갖는 93세 전혁림 화백
민족적 원시생명 '코발트블루' 색채로 현대화

그가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형형한 눈빛이나 사자 갈기의 위엄을 보이는 흰 머리칼이 아니라, 두 손이었다. 통영에서 부산까지, 아흔을 넘긴 노구로서는 제법 큰맘을 먹어야 했을 여행이었고 또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공식 행사를 치르기 위함이었음에도, 그의 두 손에는 물감이 묻어 있었고, 그 물감은 약한 녹색을 띤 짙은 청색, 즉 코발트블루였다. 원로화가 전혁림(93)의 손과 색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흔을 넘기고부터는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습관처럼 이런 말을 해 왔다. "오래 살아서 좋은 것도 있겠지. 하지만 아파서 싫어. 몸의 고통도 그렇지만 정신의 고통이 더 싫은 것이야.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잡념, 특히 죽음이 자꾸 떠올라. 그래서 한시라도 붓을 놓을 수 없어."

망백(望百)을 넘긴 전혁림 화백의 개인전이 오는 39일까지 부산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지난 20'작가와의 만남' 행사에 참석한 전 화백은 "토착적인 민족의 향기를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조형적 세계를 열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현 기자 view@

20일부터 부산 동구 수정동 부산아트센터(051-461-4558)에서 '전혁림전'이 열리고 있다. 이날 관객을 만나기 위해 전시장을 찾은 그는 "이렇게 부산에 들른 것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며 반가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시회는 전 화백으로서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화가 전혁림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밖으로 알린 것은 1938년의 부산미술전이었다. 그때 그는 '신화적 해변' '월광' 등의 작품으로 입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꼭 7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만큼 올해 들어 처음 열리는 이번 전혁림전은 그에게나, 부산으로서나 의미가 크다.

출품작은 모두 25점으로 모두 최근작들이다. 1점이 지난해 그려진 것이고 나머지 24점은 올해 완성됐다. 전 화백의 나이를 잊은 창작 의지가 그만큼 왕성했음을 엿볼 수 있겠다.

지난 70년의 세월 동안 그의 그림은 어떻게 변천했을까?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전 화백의 그림 세계에 대해 "1950년대는 양식상으로 보면 구상이지만 구상적인 외관을 넘어서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강렬한 조형 감각이 작품의 논리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근작에서는 한국미의 전통에서 맥락을 이어가는 고건축의 단청과 민족적인 원시생명이 살아있는 민화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실 전 화백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깊이 천착하면서 매번 다른 차원의 조형세계를 모색해 왔는데, 아마도 그 종착지를 '우리' 혹은 '민족', '전통' 등으로 삼은 듯하다. 이날 그 스스로 "우리 것, 우리 민족성, 우리 서정, 우리 철학, 우리의 조형을 현대적으로, 또 미래적으로 표현하려고 해요. 국적있는 그림을 그리려 한다는 것이지"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런 짐작이 전혀 틀리지는 않은 듯하다. 이경성의 평가를 다시 빌려 말하자면 전 화백은 "한국의 민족적인 문화유산을 가장 일관성 있게 현대화하여 성공한 모더니스트"인 셈이다.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노() 화백에게 진정 '그림그리기'란 무엇일까. 그는 존재의 표현이라는 말을 했다.

"태어나면 맨 처음 세상을 향해 소리를 지르지. 그건 소리가 아니라 노래야. 내가 세상에 나왔음을 알리고 축복하는 노래지. 살면서도 인간은 본래 자기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해 왔어. 노래가 그렇고 문학이 그렇고 춤이 그랬지. 그림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됩니다."

2008. 02.22 busan.com 매거진 발췌 / 임광명 기자 kmyim@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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